저기 사람이 있어요 - 용산 참사 - 오,
2009년 오늘,용산구 남일당 건물에서 진압 작전 중 철거민 5명과 경찰 특공대원 1 명이 숨진 용산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아마 캠프에 따라 보는 각도가 첨예하게 대치될 것 같아요. 첫째,사건의 이름을 용산 참사가 아니라 용산 사태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2008년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 용산4구역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상가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세입자들이 2009년 1월 19일 남일당 건물 4층 옥상으로 올랐습니다.
세입자가 된 철거민과 전국철거민연합회도 함께 도와주었습니다.재개발 조합이 지급하는 보상비와 이전비로는 다른 곳에서 재개하기 어려워 추가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옥상에 망루를 세우고 철거하는 담당자나 경찰에 맞서고 화염병과 새총으로 구슬을 쏘는 저항했습니다.당시 경찰은 철거 용 역 철거민의 위협을 묵인했습니다.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협조를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1월 19일 밤 11시 반 김석기 서울경찰청장은 진압 작전을 승인합니다. 승인 후 3시간 후인 다음날 오전 3시 경찰특공대는 출동명령을 받습니다. 출동명령을 받은 경찰특공대는 투입장소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전 예행연습도 못했어요. 또한 옥상 노의 위험 물질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신여의 위치와 양, 노의 내부구조도 잘 몰랐습니다. 진압 경찰에 대한 안전대책도 없었습니다.
경찰의 진압작전은 농성시간 25시간 만인 1월 20일 오전 6시 30분에 시작되었습니다. 6시 30분 1차 진입이 실패하고 7시 20분 2차 진입을 하기 전에 위험상황을 제거하거나 작전변경을 요청했지만 다시 신속히 진압하고 검거하라는 지시만 있었습니다. 7시 21분, 망루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7시 25분 망루에 불이 번져 잡혔습니다. 그리고 철거민 5 명과 경찰 특공 대원 중 1 명이 사망했습니다.
"당시 서울경찰청 정보과 형사들은 어떻게든 중재를 위해 남일당 옥상에 올라간 날부터 다음날 참사가 일어날 때까지 바쁘게 지냈습니다.그 정보과 형사는 법정에서 어떻게 한 번의 협상도 없이 사람이 6명이나 죽을 수 있느냐며 눈물을 보였습니다. 그 형사는 그 참사 후에 본청 정보과를 버리고 경찰서 도보 순찰을 자원해서 내려갔습니다.
당시 용산 참사와 관련해 옥상에 오른 사람들에 대해 테러범이나 법을 위반한 사람이라는 비난의 글이 있습니다. 실제 판결에서도 유죄를 받아 징역을 선고받은 사람도 있었습니다.그래도 협상도 안 하고 어떻게 25시간 만에 진압에 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누구든 불법은 아니든 하소연하면 한번은 들어주는게 인정 아니겠어요? 불법이라면 그냥 말 한번 안하고 바로 진압의 대상인가요?
그리고 위험 장소에 대한 사전 예행 연습 없이 아무런 정보도 안전 조치 없이 경찰 특공대가 투입되었습니다. 적어도 지휘하는 사람이라면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 망루 위 사람들의 안전한 해산을 위해서, 자기 부하들의 안전을 위해서 최대한 지원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면 진압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을 수 있지만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하는 공권력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합니다. 부모도 울고불고하는 아이가 있으면 처음에는 달래 보고, 결국에는 채찍을 듭니다. 아예자녀한테매를든부모이거나그런부모가되고싶은사람은없을겁니다.